굴지의 한 대기업 경영지원실 임원은 새 팀원 한 명을 뽑기 위해 사내 각부에서 ‘똑똑하다’고 정평이 난 신입 직원 10명을 불러 한자 테스트를 실시했다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신입사원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들이어서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주식(株式)’이나 ‘회사(會社)’ ‘고객(顧客)’ ‘창의(創意)’ 등 기업에서 늘 쓰는 한자를 써보라고 했더니 절반 이상을 맞힌 직원이 한 명도 없었어요.” 이 임원은 “빵점 답안지도 수두룩했고, ‘株’(주)를 거꾸로 朱木으로 그리는(?) 사원도 있었다”고 혀를 찼다.
삼성, 20점 가산
컴퓨터 세대 신입사원들의 한자(漢字) 실력이 형편없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기업들에 초비상이 걸렸다. 중국과 동남아 등 범(汎)중화권의 교역비중이 우리나라 전체 교역의 3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한자를 몰라서는 제대로 비즈니스하기 힘들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무역협회 김재철(金在哲) 회장은 “파트너 명함도 못 읽는데 무슨 비즈니스가 되겠느냐”고 개탄했다.
이 때문에 전경련과 무역협회 등 경제5단체는 19만여 회원사들에 신입사원 채용 때 한자시험을 보도록 권고했고, 실제 금호·SK그룹에 이어 삼성·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대우종합기계 등 주요 대기업들이 올해부터 한자시험을 속속 도입 중이다.
삼성그룹은 하반기에 IMF 이후 첫 그룹 공채를 실시하면서 한자능력 검증 자격증 소지자(3급)에게 가산점(20점)을 주기로 했다. 1~2점차에 당락(當落)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20점의 가산점은 합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다. 삼성그룹은 작년 이건희(李健熙) 회장이 직접 “중국을 이해하려면 ‘한자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문하며, 한자 시험 도입을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중공업도 올 초부터 면접기간 중에 한자시험을 별도로 치르고 있다. 한자능력검증 시험 4급 수준의 문제를 골라 고득점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방식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중고교 수준의 문제인데도, 점수는 100점 만점에 평균 30점 수준”이라며 “이래서는 조선 분야 기본 용어조차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현대·기아차그룹과 한화그룹·현대상사·조흥은행 등도 한자시험 도입을 추진 중이다.
대기업 76% "찬성"
SK·금호그룹은 10여년 전부터 한자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최종현(崔鍾賢) SK회장, 박성용(朴晟容) 금호명예회장 시절 때 이미 ‘중국 비즈니스에 대비해야 한다’며 한자시험을 도입했다. 특히 금호그룹은 입사 후 한자 능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승진도 안 된다.
기업의 한자시험 도입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채용전문업체 인크루트가 최근 주요 대기업 145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6.6%(111개사)가 ‘입사 때 한자시험을 보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